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성(茶聖) 초의선사(草衣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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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호 칼럼니스트
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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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승려로서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정립시킨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는 본명이 장의순(張意恂)이며 본관이 인동(仁同)이다. 호를 초의(艸衣) 또는 일지암(一枝庵)으로 썼다. 5세 때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당하였을 때 부근을 지나던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를 계기로 15세에 출가해서, 19세 때에 해남 대흥사(大興寺)에서 완호(玩虎) 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함께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후 전국의 선(禪) 지식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익혀 통달하게 되었다.
선사가 한양의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유(儒)·불(佛)·선(禪) 학문과 사상적 기반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조선 최고의 경세가이자 실학의 거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만나면서부터다. 다산은 해남에서 가까운 강진(康津)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선사가 다산초당으로 찾아가 두 거목 사이에 사제(師弟)의 연(緣)이 맺어졌다. 선사는 스물네 살 연배인 다산의 문하에서 유학과 경서를 공부하며 다선(茶禪)의 진미와 실학 정신을 익혔다.
선사는 다산으로부터 시, 서, 화는 물론 다(茶)까지 익혀 사절(四絶)이란 별칭을 갖게 됐다. 나이 30세 되던 해엔 다산의 두 아들 학연, 학유 형제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비롯하여 장안의 이름난 문사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선사는 동갑인 추사와 사상과 종교를 떠나 인간적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훗날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선사는 여러 차례 제주도를 방문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한번은, 선사가 제주도에서 몇 달을 추사와 함께 보낸 후 떠나려 하자 “산중 절간에 무슨 큰일이 있다고 벌써 가려 하느냐?”며 추사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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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에 있는 초의선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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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추사 간에 금란지교를 맺어 준 것은 차(茶)다. 곡우(穀雨)를 전후하여 갓 피어난 찻잎의 새순을 따, 무쇠 솥에 덖어서 말리고 숙성시켜, 제대로 된 맛과 향을 살리기까지는 족히 반년이 넘게 걸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가, 옥화차(玉花茶)다. 옥화차가 다시 바다를 건너 추사 손에 들어갈 때는 아무리 빨라야 입동(立冬) 절기를 지나야 한다. 선사가 보내준 옥화를 받아든 추사는 입춘을 기다리며, 대접을 깨끗이 씻어 장독대에 올려 두었다가, 밤새 빗물이 고이면 그 입춘수(立春水)로 먹을 갈아 남도의 봄소식과 함께 선사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쓰곤 했다.
우리나라의 차(茶) 문화는 고려 때 혜심(慧諶) 진각국사(眞覺國師 1178∼1234) 시절에 사찰마다 차(茶)를 공양하는 마을이 지정될 정도로 크게 성행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불교가 쇠퇴하면서 그 명맥을 잃어갔다. 그러다 조선 후기 다산과 초의에 의해서 우리 민족 고유의 다도(茶道)가 다시 살아났다. 초의선사는 선(禪)과 도(道)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우리 생활 속에 있다는, 이른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창했다.
선사가 집필한 『다신전(茶神傳)』에는 오늘날 우리가 차를 마실 때도 흔히 보는 복잡한 절차나 형식이 없다. 차를 홀로 앉아 마시면 신비롭고, 두 사람이 함께 마시면 고상한 경지를 이룰 수가 있다. 3~4인이 어울려 마시는 것은 그저 취미로 마시는 것이요, 6~7인이 모여 마시는 것은 그냥 찻잔을 주고받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봄날을 시샘하듯 아침부터 보슬비가 조용히 대지를 적신다. 따끈한 옥화(玉花)를 마주하고 고상한 경지를 나눌, 그 누군가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