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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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문학가 중의 한 명이다. 러시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결투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수많은 시와 소설을 남겼다. 그의 작품 가운데 삶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고단한 우리네 삶에 희망과 위안을 주기에 족하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롯데호텔 소공동점 앞 사거리로 나서면, 양손에 펜과 노트를 들고 고뇌에 찬 모습으로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푸시킨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을 받치고 있는 받침석에는 지난 2009년 롯데호텔이 첫 해외 진출로 <롯데호텔 모스크바>점 개설을 기념하기 위하여, 2013년 <러시아 작가 동맹>이 푸시킨 동상을 기증하고, 롯데호텔 측에서 건립부지를 제공하였다는, 동상 건립의 배경과 함께 푸시킨의 작품과 연보 등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동상의 받침석 전면에는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알렉산드르 뿌쉬낀, 1825년-” 시가 음각되어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은 작가명에 ‘뿌쉬낀’이라 쓰여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외국어에 대한 한글 표기법과도 맞지 않게 ‘뿌쉬낀’이라 쓰게 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 강점기 동경 유학생 신분이었던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이 최초로 이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그 원인은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푸시킨은 어린 시절부터 전통적 러시아 관료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자유주의적 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러시아의 농노 제도 및 전제 정치를 비판하는 다수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 같은 그의 작품 성향으로 인해 그는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반체제 작가라는 낙인과 함께, 1820년 남부 러시아로 추방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푸시킨은 러시아 시(詩) 문학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1825년 푸시킨의 나이 26세, 유배형에서 풀려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가 허용되었다. 이때 사귀던 여인의 시첩(詩帖)에 적어준 시가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하지만 푸시킨은 여전히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그가 쓰는 모든 작품은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푸시킨은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사교계에 출입하며 여러 여성 편력으로 지새는 날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남편과 사별한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만나 결혼(1831년)하며 다소 생활에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차이콥스키가 오페라로 각색한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32년)과 대표작으로 꼽히는 『대위의 딸』(1836년) 등의 걸작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도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 했던가, 푸시킨의 귀에 들려온 것은, 아내 나탈리야가 프랑스 귀족 출신의 단테스와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뜻밖의 소문이었다.
분(憤)을 참지 못한 푸시킨은 처제의 남편이자 연적인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투에서 중상을 입은 그는 이틀 뒤 자신의 서재에 쌓여있는 장서를 향해 “안녕, 친구들!”이란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아내의 염문에 좀 더 침착했다면 비극적인 종말 대신, 더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를 푸시킨.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며,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 말이 틀린 말은 아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