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당 최영경(崔永慶)
“그대는 이 글자의 뜻을 알고 있는가?”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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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최영경(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고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남명(南冥) 조식의 고제(高弟)로, 율곡(栗谷)으로부터 “청렴개결하길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평을 들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으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곧바로 신원이 회복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묘소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경기도 고양시 고양동 선영에 있다.
수우당은 김천의 입향조 최원지(崔元之)의 차남으로, 조선 태조 조에 제용감부정(濟用監副正)을 지낸 자하(自河)의 7대손이자, 통정대부 대사성을 지낸 사로(士老)의 5대손이다. 고조부 한정(漢禎)은 예조참의, 증조부 중홍(重弘)은 전라도 관찰사, 조부인 훈(壎)은 교하(交河) 현감을 역임하였다. 이렇듯 수우당은 선대로부터 병조좌랑의 선친 세준(世俊)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살아온 집안에서, 중종 24년 한양 원동리(창경궁 인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수우당은 당쟁이 파다한 험난한 세태에서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일찍이 남명 문하에 들어갔다.
선조(宣祖)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수우당은 모두 사양하고 외가의 전장(田莊)이 있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은거하고 있었다. 이때 여러 선비가 찾아와 붕당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또한 사양하였다. 여기에 선조가 다시 사헌부 지평, 교정청 낭관 등의 관직을 제수하자, 사의 표명과 함께 붕당의 폐단에 관한 소(疏)를 올렸다. 이때 마침 누이(인종의 후궁)의 뒷배를 믿고 “자존망대”에 빠져있던 정철(鄭澈)이 수우당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나기를 청했으나 수우당은 그가 “색성소인(索性小人)”이란 이유로 거절하였다.
여기에 앙심을 품게 된 정철은 어사 오억령(吳億齡, 1552년~1618년)에게 수우당의 허위 죄상을 만들도록 사주하였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정철과 성혼 등은 그물을 보다 멀리 넓게 치기로 작정하고, 그를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얽어 넣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우당의 인물됨을 알고 있던 류성룡, 이항복 등이 그의 처벌을 반대하자 정철은 서둘러 수우당을 하옥시키고 문초에 들어갔다. 노구에 쇠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 눕자, 곁에 있던 수인(囚人)이 한 말씀 가르침을 청하였다. 수우당이 일어나서 붓을 잡아 크게 정(正)자를 쓰고 돌아보며 “그대는 이 글자의 뜻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은 다음, 더 이상의 말문을 잇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선조는 흉혼독철(凶渾毒澈)이란 말로 성혼과 정철이, 죄 없는 선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탄식하며 이들을 파직시켰다. 당시 조선 시대의 패관(稗官) 문학서(文學書)로 당쟁사를 다룬 『대동야승(大東野乘)』 등에 따르면 당시 수우당의 죽음은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려진 송익필이 서인의 득세를 위해 성혼과 정철에게 사주하였다는 설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 당시 영의정으로 수우당의 묘갈명을 지은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은, “공(公)은 하늘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고고하게 살기를 원했건만, 간흉(奸凶)들이 쳐 놓은 흉계에 걸리어 억울하게 천수를 누리지 못하였다”라고 적고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암시하여주고 있다.
현재 수우당의 위패는 경남 산청 덕천서원에 남명과 함께 배향되어 있고, 그가 강학을 펼쳤던 진주 도강서당에는 선조의 사제문비(경남 유형문화재 378호)가 있다. 또 한 이곳엔 당시 수우당이 제자들과 함께 심은 수우송과 유허비가 있어, 성색(聲色)과 이끗에 초연하였던 생전의 그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崔松雪堂), 전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고 최석채(崔錫采),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최병렬(崔秉烈)이 모두 그의 혈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