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정 월산대군(月山大君)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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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서울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사이, 양화나루 언덕에 자리한 망원정(望遠亭)은 '산수(山水) 간의 먼 경치를 잘 볼 수 있다’라는 뜻을 지닌, 조선 시대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던 정자이다. 하지만 이곳은 세조임금의 맏손자로 두 번씩이나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 비운의 왕자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이정(李婷), 1454~1488)의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조선조에서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세자는 모두 27명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12명은 왕좌는 고사하고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을 죽인 체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야 했다. 요절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장남이었던 월산대군은 세조가 승하하면서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 보위를 물려받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4살 위의 삼촌 예종(睿宗)에게 왕좌가 돌아갔다. 이후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붕어(崩御)하면서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병약하다는 핑계로 12세의 동생 자을산군(者乙山君, 성종:1457~1494)에게 왕좌를 양보해야 했다.
당시 왕실의 어른으로 왕위 계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인물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인수대비(仁粹大妃)였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 대군(齊安大君, 3살)은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의경세자(덕종)의 두 아들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을 놓고 저울질을 거듭하다 상대적으로 뒷배가 든든한 자을산군을 낙점하였다. 지난날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던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잃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다. 당시 월산대군의 장인은 소헌왕후(세종비)의 조카로 힘없는 박중선(朴仲善)에 비하여, 자을산군의 장인은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거물 한명회(韓明澮)였다.
이렇듯 자을산군이 서열을 무시하고 등극하자, 가장 입지가 난처해진 인물은, 왕의 친형 월산대군이었다. 시와 문장에 능했던 월산대군은 자신의 집(현재의 덕수궁)에 ‘풍월정’이란 정자를 마련하고, 만권서(萬卷書)를 쌓아놓고 자연과 풍류를 즐기려 하였다. 하지만 마냥 유유자적할 수만은 없는 것이 정치와 권력의 세계이다. 형제간의 우의가 아무리 좋아도 권력은 서로 나눌 수 없는 법, 당시 종실의 좌장이었던 귀성군 이준(李浚)은, 왕권의 ‘장자승계’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역모의 누명을 쓰고 귀양길에 나서야 했다. 언제 어떻게 저와 같은 올가미가 자신에게 뻗쳐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월산대군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찾은 곳이 망원정이다.
원래 망원정은 희우정(喜雨亭)이란 이름의,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서(別墅)였다. 월산대군은 이를 개축하여 현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망원정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실제로 망원정에서 바라보이는 눈 덮인 서호(西湖)와 양화 들판은 예로부터 한양십경(漢陽十景) 중의 하나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월산대군이 말년에 읊조린 이 시조는 물욕과 명리를 다 내려놓은 무심(無心)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국의 왕자였지만, 왕실의 ‘아웃사이드’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에 앞서, “자신의 묘를 대궐과는 반대 방향으로 만들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와 권력의 세계란 죽어서조차 마음 편할 수 없는 차갑고 비정한 것이다. 현재 팔작지붕의 2층 누각 형태를 취하고 있는 망원정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이다. 또 한 한양의 궁궐을 등지고 누워있는, 고양의 북촌마을 월산대군 묘역은 고양시 향토 문화재 제1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