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제와 송홍(宋弘)
“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 아내...”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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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황제로 손꼽히는 후한(後漢)의 창업 군주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BC5~AD57)만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제가 된 인물도 드문 듯하다. 유수는 한(漢) 고조 유방의 9세손으로, 황손의 핏줄이긴 하나 누대(累代)에 걸쳐 집안이 쇠락하여 어린 시절을 한적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유수가 출생할 당시 한나라는 그 운이 쇠퇴하여, 황실의 외척인 왕망(王莽)이 신(新, AD8~23)이란 나라를 막 창업한 때였다.
유수는 위로 유연(劉縯)과 유중(劉仲) 두 명의 형이 있었다. 큰형 유연은 성격이 호탕하여 차분하게 현실에 안주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사람을 이끄는 뛰어난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하여 유수는 형과는 달리 여성스러운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도 못하였다. 따라서 유수는 자신이 난세를 평정하고 황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체, 태학에서 글이나 읽는 매사에 조심성 많고 조용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에서 멀쩡한 젊은이가 한가롭게 책이나 읽으며 지내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왕망의 부도덕한 정치가 계속되자, 각지에서 군웅이 우후죽순처럼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고, 유수의 형제들도 옛 한나라의 부활을 명분으로 거병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수의 형인 유연이 병사를 모으려 하였으나, 생각처럼 병사들이 잘 모이지 않았다. 결국, 동생인 유수가 소를 타고 앞장을 서자, 평소 유수의 어진 성품을 높이 평가했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병력의 숫자는 크게 불어났다. 당시 유수의 꿈은 벼슬로는 집금오(執金吾; 복장이 화려한 초급 무관)이고, 여인으로는 평소 흠모하던 음려화(陰麗華)를 아내로 맞는 것이었다.
이 같은 유수에게 기회가 온 것은 세계 전쟁사에도 그 이름이 올라있는 이른바 곤양대첩(昆陽大捷)이었다. 유수가 3천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왕망의 40만 대군을 격파시키자 주변의 군웅 호족들이 구름처럼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유수가 마침내 낙양(洛陽)을 근거지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이때가 서기 25년(건무 원년)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황제 유수는 지난날 자신이 연모했던 음려화를 황후로 맞아드렸다. 그러다 광무제가 신혼 3개월 만에 다시 출정하여 하북(河北)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적국 왕의 조카인 곽성통(郭聖通)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광무제는 한꺼번에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2명의 황후를 두는 경사를 맞이했다.
하지만 광무제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황제로서 누이인 호양공주(湖梁公主)의 배필 하나 찾아주지 못한 체, 자신만 여인들에 둘러싸여 있기가 다소 미안하였기 때문이다. 광무제는 어느 날 누이를 불러, 그간 마땅한 신랑감이라도 물색해 두었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자, 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송홍(宋弘) 대감이라면 당장이라도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송홍의 뛰어난 인품은 세상이 다 아는 일, 하필이면 유부남을 마음에 두고 있는 누이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누이를 병풍 뒤에 숨겨 두고 송홍과 단둘이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광무제가 “사람이 신분이 높아지면 친구를 바꾸고, 재물이 넉넉해지면 아내를 바꾼다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묻자, 송홍이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으며 함께 고생한 아내는 버려선 안 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광무제가 병풍 쪽을 향해 “안 되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 표를 겨냥한 페미니즘 논쟁이 격렬해지고 있는듯하다. 페미니즘의 원조(?) 격인 ‘조강지처’ 고사를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