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李之函, 1517~1578)
“동풍에 얼음이 녹고, 메마른 나무가 봄을 만났도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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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조선의 3대 기인(奇人) 중의 한 명이었던 토정(土亭) 이지함은 일찍이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측하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신통력을 가진 인물로 곧잘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즐겨보는 <토정비결>의 원저자인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많다. 토정은 한산(韓山) 이씨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충남 보령에서 이치(李穉)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큰 형인 지번(之蕃)을 따라 한양에서 살았다.
형으로부터 뒤늦게 글을 익힌 토정은 독학으로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이후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자전(經史子傳)>을 비롯하여 역학,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등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이 같은 토정에게 과거시험을 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지만, 큰 형이 아직 급제 전이라 과거를 미루고 있었다. 이때 죽마고우였던 친구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1545)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왕족이었던 장인 모산수 이정랑(李呈琅)이 이홍윤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토정은 처가에 재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처가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신분의 강등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신분의 강등은 곧 출사(出仕)할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었다. 토정은 과거 한번 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할 신세가 되었지만, 세속의 부귀나 명리에 연연할 그가 아니었다. 마포 어귀에 흙집(土亭)을 짖고 살며, 무쇠로 만든 갓(鐵冠)을 쓰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전국을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다 외딴 섬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가 하면 상민들에게 소금을 만드는 법, 장사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하지만 토정 본인은 운명처럼 평생토록 가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이때 형님의 아들이자 조카인 이산해(李山海, 후일, 영의정으로 북인의 영수에 오름)가 자신의 10살 난 딸의 중매를 부탁하였다. 토정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작은 오두막집 한 채를 일러주며, 좀 가난하긴 하지만 장차 큰 인물이 나올 집이니 찾아가 미리 청혼해 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 집 아이가 자네보다 더 이른 나이에 재상이 될 것이니 두고 보아라”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훗날 오성과 한음으로 이름을 떨치며 38세에 재상에 오른 문익공 이덕형(李德馨)이 다. 이후 토정의 신원(伸寃)이 회복되고 신분이 복권된 것은, 그의 나이 50세가 넘어서이다.
1570년(선조 6년) 재야의 선비로 학행(學行)이 뛰어난, 최영경, 정인홍, 조목, 김천일과 함께 전국 5 현사(賢士)의 한 명으로 뽑히면서, 토정은 포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토정은 서해의 염전을 개발하여, 소금을 곡식과 바꾸어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자신의 상소가 채택되지 않자 곧바로 사직하였다. 이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부임하여 걸인과 노약자를 위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었다. 하지만 목민관으로서, 민생을 개선하여 백성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였다.
토정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백성들은 마치 자신들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이후 여러 도참서나 예언서들이 주역과 음양술수(陰陽術數)에 밝았던 토정(土亭)의 명의를 다투어 가차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집단저작물처럼 나타난 것이 오늘의 <토정
비결>이 아닐까(?). <토정비결>의 첫 괘의 풀이는 “동풍에 얼음이 녹고, 메마른 나무가 봄을 만났도다(東風解氷, 枯木逢春)”이다. 그간의 오만과 불통으로 얼룩졌던 지난날을 접고, 고목에 싹이 돋는 희망의 새봄이 오기를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마음으로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