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柏)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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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국보 제180호인 추사(秋史)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귀양살이를 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귀한 책들을 구하여 보내주는 제자에게 답례로 그려준 한 폭의 문인화이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화제로, 간결하고도 절제된 필치의 가로 69㎝, 세로 23㎝의 작은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한중일을 대표하는 문인화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이며,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이자, 이조판서를 지낸 노경(魯敬)의 아들로 정조 10년 예산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의 가르침을 받았고, 24세 때에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북경)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청나라 석학 옹방강(翁方綱)으로부터 경학과 금석학에 관한 신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완원(阮元)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렇듯 중국의 신학문을 일찍 접한 그는 세도 가문의 줄을 타고 규장각 대교,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헌종 6년(1840),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에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때 추사는 자신의 옛 제자이자 역관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간의 노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 보내주었다. 그림은 초막 한 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는 모습을 갈필의 마른 붓질로 추사 자신의 힘들고 외로운 상황을 담담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편 상단에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와 함께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라는 인장을 차례로 찍은 다음, 하단에는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한장(閑章)을 찍어 놓았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아들고 중국에 들어가 청나라 학자 16명의 제찬(題贊) 받았다. 이것이 세한도의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이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과 김준학의 손을 거쳐,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와 그의 아들 민규식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세한도는 여러 명의 손을 거쳐 인사동 골동품상 매물로 나온 것을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 치까시(藤塚鄰)가 입수하였다. 일본의 대표적 동양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청조학(淸朝學)은 조선의 추사에 의해 완성되었다”라고 단정하였다.
1944년 여름, 태평양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자 후지쯔까는 세한도를 들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때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일본까지 따라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세한도를 넘겨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매번 거절당하였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다음 후지쯔까는 돈은 필요 없으니 보관만 잘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세한도를 소전에게 넘겨주었다. 소전이 세한도를 들고 귀국한 후 3개월 뒤, 후지쯔까의 집은 미군의 공습을 받고 잿더미로 변하였다. 운명처럼 살아남은 세한도에 추사의 문인 김석중이 찬(贊)하고, 정인보, 이시형, 오세창 등이 발문하였다. 세한도는 길이 10여 미터의 긴 두루마리로 불어나면서 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전은 세한도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맹세하였지만, 형편이 어려워지자 개성상인의 후예로 미술품 수집상인 손세기(孫世基,1903-1983)에게 이를 넘겼다. 그간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몸값이 오른 세한도는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에 의해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다. 그러던 지난해 손창근이 국가에 무상 기증 의사를 밝힘으로써, 세한도는 험난하고도 장구한 여정 끝에 11번째의 주인인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한도의 장무상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