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시체 감식 결과 사망 시간은 3일 전인 4월 5일로 추정됐고 경찰이 공식 발표한 사망 원인은 권총 자살이었다. 아직까지도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주장은 그의 아내이자 그녀 역시 록 계의 여전사이기도 한 코트니 러브가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지만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아무튼 그런지의 영웅은 그렇게 산화했고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다. 우연히도 1970년대 초반 나란히 세상을 떠나갔던 록 계의 영웅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이른바 3J의 나이도 모두 스물일곱이었으니 젊은 음악 영웅들에게는 스물일곱이라는 나이가 그렇게도 버거웠던 것일까?
그런지는 1990년대 초반 록 음악의 타락과 상업화에 반기를 들고 들불처럼 일어났다. 록의 대안을 부르짖었던 까닭에 얼터너티브 록이라 불리기도 했던 그런지는 펑크의 유산을 물려받아 거칠고 단순함을 추구했으며 노랫말에는 저항과 분노의 정신을 담았다. 그런지는 또 시애틀이라는 지역적 중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소위 시애틀 4인방이라 불리는 그런지의 대표 그룹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 가든이 모두 시애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았던 선두주자는 단연 너바나였고 너바나 호의 선장이 바로 커트 코베인이었다.
하지만 앨범 ⌜Nevermind⌟의 빅히트와 함께 너바나의 위기는 너무 일찍 찿아 왔다. 스스로가 자신들이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던 상업적 성공 가도에 들어서는 순간 너바나는 방향을 잃어버린 배처럼 표류했고, 밴드의 정체성은 흔들렸다. 그들이 비판하고 저주하던 자들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자신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너티브의 순순한 정신과 상업적 성공이라는 이율배반 앞에서 커트 코베인은 끊임없이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근원적인 아픔은 결코 치유 될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마침내 커트 코베인은 장렬한 산화를 결심했고 1994년 4월 8일, 불행히도 그것은 우리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아직 까지는 자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커트 코베인은 정말 아쉽게도, 정말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Nevermind⌟를 발매한지 3년만에 샷건을 입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는데, 당시에는 이를 모방한 자살도 미국 내에서 꽤나 많아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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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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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영의 노래 가사를 빌어 ‘기억해 주기 바란다. 점차 희미해져 가기보다는 한순간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라고 끝맺는 유서를 남긴 채 먼 길을 떠난 그런지의 영웅 커트 코베인, 그가 이끌던 밴드의 이름처럼 그는 지금 열반(Nirvana)에 들었을까?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사랑받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미움받는 것이 낫다.
I'd rather be hated for who I am than be loved for who I'm not.
열정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
Rather be dead than cool.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한 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다.
It is better to burn out than fade a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