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 남효온(南孝溫, 1455~1492)
“강물 서쪽 흘러가는 보리 익는 계절이라”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
 |
|
ⓒ 김천신문 |
추강(秋江) 남효온은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으로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 행우(杏雨)이며 한양에서 태어났다. 1478년, 그의 나이 24세 때,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소릉(昭陵)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훈구세력들로부터 ‘미친 선비’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박팽년·성삼문 등 6인에 관한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며 살아있는 권력과 정면으로 맞섰다.
추강은 일찍이 영의정을 지낸 남재(南在)의 5대손으로, 총명하고 호방하여 매사에 고사(高士)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그가 약관의 이른 나이에 혁명가의 거친 삶 속으로 뛰어든 배경에는 조선 초기의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나는 시대적 공분(公憤)과 함께, 선대의 영화를 이어가지 못한 그의 가족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추강의 고조부였던 남은(南誾)은 조선의 개국 1등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정도전과 함께 ‘왕자의 난’ 당시 주살되었고, 좌의정을 지낸 증조부 남지(南智)는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단종의 보필을 부탁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다.
추강의 당숙 벌이자 태종의 외손자였던 남이(南怡) 장군 또한 유자광을 비롯한 훈구파(勳舊派)의 모함으로 역모로 몰려 멸문의 화를 입었다. 추강은 단종 3년에 태어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세조(世祖)의 만행과 함께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이처럼 기성 정치권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는 그에게 훈구세력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성종(成宗) 9년(1478)에 일어났다. 새해 벽두부터 흙비(土雨)가 내리고,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이어지는가 하면, 이른 봄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리고, 가을에는 복숭아와 자두나무에서 꽃이 피는 기현상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군주(君主)가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노하여 기상이변과 함께 갖가지 천재지변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시되던 당시,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청정을 마감하고 막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성종은 “짐(朕)이 어떻게 하면 흙비가 내리는 재앙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국정 전반에 걸친 반성과 대안을 묻는 구언교(求言敎)를 내렸다. 추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종 대왕에게 올리는 상서(上書)’라는 제목으로 그간에 금기시하였던 소릉 복위를 비롯하여, 정창손, 한명회 등 훈구세력들을 내치는 것이 천심(天心)에 순응하여 변괴(變怪)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대궐엔 여전히 세조를 옹립하였던 정난공신의 세력이 주축인 상황에서 추강에게 돌아온 것은, 훈구세력으로부터의 각가지 음해와 비판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인 간난신고(艱難辛苦)뿐이었다. 추강은 출사를 단념하고 지금의 고양시 행주(杏洲)나루에 은거하며, 유장(悠長)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벗 삼아 술과 시로 울분을 달래야 했다. 이때 신영희·홍유손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무악(毋岳)에 올라가 함께 통곡하기도 하고 스산한 강가에서 고기를 낚기도 하였다. ‘가을의 강’이란 뜻의 추강(秋江)이란 호는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푸른 갈대 모래톱에 고기잡이배 매어두니/ 강물 서쪽 흘러가는 보리 익는 계절이라/ 스쳐 가는 바람 따라 구름이 비 뿌리니/ 강가 오두막서 이 한밤 갈매기와 짝하네”. 당시 추강이 읊조린 행주초정(幸州草亭)이다. 이후 추강은 병고에 시달리다 39세로 요절하였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연산군 10년 난신(亂臣)으로 규정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1511(중종 8)년 김시습 등과 함께 신원이 복권되었다. 후일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