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상군(孟嘗君, ?~BC 279년)과 풍환
영리한 토끼는 3개의 굴(屈)을 만든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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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재상 맹상군 전문(田文)은 형제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 아버지 전영(田嬰)의 뒤를 이어 산동성 동쪽의 설(薛)이라는 지방의 영주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평소 선비들을 존중하여 그의 집엔 3천 명이나 되는 문객이 머물고 있었다. 그의 식객들은 저마다 학식과 재주가 뛰어난 인물임을 자처하며, 언젠가는 재상의 눈에 들어 출세해 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풍환(憑驩) 이라는 사람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풍환이 처음 맹상군을 찾아왔을 때 그는 낡은 짚신에 칼집도 없는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 같은 그에게 맹상군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오셨는지요?" 하고 묻자 풍환은 "저는 귀공(貴公)께서 선비를 좋아하신다기에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맹상군은 그를 전사(傳舍-하등 식객이 머무는 방)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10여 일이 지난 다음 총감에게 풍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묻자, "그는 밥만 먹고 나면 자신의 긴 칼을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장검아! 고기반찬이 없으니, 우린 돌아가느니만 못하구나'라며 노래 부른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은 풍환을 행사(幸舍-중등 식객이 머무는 방)로 옮기게 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총감에게 "풍환이 이제는 흡족해하던가?" 하고 묻자, 그는 여전히 장검을 튕기면서 “문을 나설 때 마차가 없으니 장검아, 우린 돌아가느니만 못하구나!”라고 불평하고 있다고 하였다. 맹상군은 마지못해 그를 상등 식객이 머무는 대사(代舍)로 옮겨 주었다. 그리고 또 닷새가 지나자 풍환은 역시 칼을 어루만지며 살림집이 없다고 투정을 불렀다. 맹상군은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자신의 가족들까지 데려와 생활할 수 있는 최고 대우의 등급으로 대접하였다.
이즈음 맹상군은 설(薛) 땅의 소작인들에게 빌려준 돈의 이자가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 식객을 거느리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맹상군이 식객들을 모아 놓고, "누가 설 땅으로 가서 내가 빌려준 돈의 이자를 받아 올 수 있겠소?"라고 묻자, 풍환이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풍환은 출발에 앞서 "징수가 끝나면 그 돈으로 무엇을 사 올까요?"라고 묻자 맹상군은 "우리 집에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네, 그대의 마음대로 하시게."라고 대답하였다.
설 땅에 도착한 풍환은 채무자들에게 맹상군의 뜻이라며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소작인들의 차용증서를 모두 모아 불태워버렸다. 채무자들은 “맹상군 만세,”를 외치며 그의 넓은 아량에 감사해하였다. 이윽고 풍환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맹상군은 그에게 "과연 무엇을 사 왔는가?"라고 물었다. 풍환은 “주군(主君)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십니다, 다만 한가지 의(義)가 빠져 있어 의를 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맹상군은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마 후, 맹상군이 사소한 일로 제(齊)왕의 미움을 받고 급히 설 땅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영지의 백성들은 지난날 맹상군이 이자를 탕감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열렬히 환영하였다. 맹상군은 풍환을 돌아보며 "지난번 그대가 '의(義)'를 사 왔다는 말을 이제야 알겠네."라며 사의를 표했다. 풍환은 "교활(영리)한 토끼는 3개의 굴을 만들어 위험을 피한다고 합니다(狡免三窟). 주군께서는 이제 겨우 굴 하나를 마련하였을 뿐,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라고 하였다.
이후 풍환은 위왕(魏王)과 제왕(齊王)을 차례로 설득하여 두 개의 굴을 더 만들고, “주군께서는 이제부터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高枕無憂) 주무셔도 좋습니다.”라고 맹상군에게 아뢰었다. 다변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과연 몇 개의 굴이 필요 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