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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1388(고려, 우왕 14)년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반발한 고려는 즉각 최영 장군을 팔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에 나섰다. 왕명에 따라 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이성계가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송도(松都, 개경)로 역진격(逆進擊)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면서 요동 정벌을 지휘하던 우왕(禑王)과 최영 장군은 급히 송도로 돌아와 이성계 군에 대항하였으나, 급조한 병력으로 정규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성계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었고, 최영 장군은 현재의 고양시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 보내졌다. 하지만 최영 장군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심해지자, 이성계는 경남 합포(合浦)와 충주 등지로 여러 차례 그의 귀양지를 변경시켜야 했다. 이윽고 하루라도 빨리 결판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성계는 최영 장군을 체포한 지, 만 2달째가 되는 그해 12월, 그를 개경으로 데려와 처형하였다.
당시 개경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고 침묵의 항의를 하였는가 하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반발 속에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백성들의 원성을 피하는 방법으로 급히 전제(田制)를 개편하여 많은 농토가 소작농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그간에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쌀 한 톨 구경하기가 어렵던 농민들이 제대로 된 쌀밥을 먹게 되면서 이성계에 대한 원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바로 이때 생겨난 말이 이성계가 밥을 먹게 해 주었다는 의미로 “이(李)밥에 고깃국”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편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기를 들은 민초(民草)들은 이성계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최영 장군을 무속신앙(巫俗信仰)의 한 형태인 장군신(將軍神)으로 모시며, 마을의 수호신이나 자신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에서 대체로 장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은 대부분 무관 출신으로 관우와 장비, 강감찬과 남이 장군 등과 같이 그 자신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한 삶을 살았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들이다. 당시로서 여기에 최영 장군만큼 적합한 인물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과거 고려에 대한 민중들의 향수는 곧바로 최영 장군을 신(神)을 기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최영 장군의 신(神)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은 물론 개인의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관장하는 것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지면서 오늘날까지 도당제(都堂祭)란 이름으로 고을과 마을마다 굿이 행해지고 있다. 최영 장군의 도당굿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이름난 곳은 송도의 덕물산 도당굿이다. 한양을 비롯한 전국 팔도의 유명한 무당들이 총동원되는 덕물산 도당굿에는 제물(祭物)로 특별히 돼지머리를 삶아 놓았는데, 바로 이 돼지머리를 ‘성계육(成桂肉)’이라 불렀다고 한다. 돼지머리에 이성계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가 태어난 해의 띠가 돼지(해, 亥)이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이성계를 모욕하며 반항하려는 백성들의 의지가 깔려있다.
오늘날 각종 행사에 앞서 지내는 고사(告祀)상에 돼지머리를 놓는 풍습과 함께 “성계육을 씹어 봐야 고기 맛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은 모두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 백성들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성계육을 즐기고 있다는 보고 받고를 회한(悔恨)의 눈물을 뿌리곤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최영 장군은 억울하게 목숨을 내어주었으나 백성들이 두고두고 흠모하는 신(神)으로 부활하였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