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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고려의 국운이 저물어가던 여말(麗末),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신 이조년(李兆年)은 경북 성주(星州) 지방 호족 출신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장경은 아들들의 장수를 바라는 뜻에서 첫째부터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들 다섯 명의 아들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는가 하면 형제간에 우애도 남다르게 좋았다. 성주이씨 시조는 고려 태조 때 성주지역을 다스리며 호장 벼슬을 지낸 이순유다. 그의 12세손인 이장경이 중시조가 되면서 그들의 가문은 급격하게 번창하였다. 이장경의 후손들 중에서 특기할 인물로는 문하시중을 지낸 이만년과 그의 아들로 홍건적을 물리친 이승경이 있다. 그리고 이백년의 손자 이숭인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 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며, 이조년의 손자 이인임은 벼슬이 좌시중에 이러렷다. 이렇듯 성주이씨 문중은 고려 말과 조선 개국 시기에 걸쳐 많은 공신을 배출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이여송(李如松,1549~1598)은 이천년의 8세손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투금탄(投金灘)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사이좋은 두 형제가 나란히 길을 가다 금덩이 두 개를 주어, 하나씩 나누어 갖고 현재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소재 공암(孔巖)나루(양천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배가 강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아우가 갑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놀란 형이 그 이유를 묻자, 아우는 태연하게 금덩이 때문에 “우리 형제간에 우애가 손상될 것 같아 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 역시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는 내용이다. 《성주이씨가승》은 위의 이 이야기 주인공이 바로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후세에 형제투금(兄弟投金)이란 전설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투철한 신념과 남다른 국량을 지녔던 이조년이었지만, 충렬왕의 원(元)나라 호종(扈從)사건에 휘말려 그의 나이 39세에 관직에서 밀려나 고향 성주로 돌아왔다. 이조년은 아무른 죄도 없이 권력에서 밀려났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으므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대범한 군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후 그는 13년여 년 간 고향에서 은거하며 매운당(梅雲堂)을 세우고 백가지 화초를 심어놓고 〈백화헌시(百花軒詩)〉를 지으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여말(麗末)의 혼란한 정국은 이조년을 더 이상 초야에 묻혀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자 이조년은 즉시 한림원의 관원 16명의 서명을 받아 홀로 원나라에 가서 충숙왕을 변호함으로써 충숙왕이 무사히 고려로 돌아와 국정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1330년 세자로 원나라에 들어갔던 충혜왕이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이조년은 감찰장령, 군부판서 등을 직을 두루 맡았다. 이때에도 이조년은 여러 차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고려왕을 비롯하여 고려의 국권을 해치려는 세력들을 물리쳐야 했다. <다정가(多情歌)>는 이조년이 노쇠하여 고향 성주로 귀향하여 아직도 어린 임금의 앞날을 걱정하는 심정으로 지은 충애(忠愛)의 시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은 난세에 태어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뛰어난 정치가요 시인이었다. 훗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이조년을 고려 500년 역사중 제1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최재호, 칼럼니스트/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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