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이씨 문중의 효부 열녀인 김순임(金順任)은 대덕면 조룡리 김녕(金寧) 김씨 시조공 24세손 병권(秉權)의 1남 1녀 중 장녀로 1932년 임신년에 출생했다. 그리고 남편 이영기(李永基)는 벽진이씨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전서공계(典書公系) 경암공파(鏡巖公派) 우동(愚東)의 5남 2녀 중 3남으로 1932년 2월 10일 부항면 지좌리 281번지에서 출생했다.
이웃한 마을의 이장(里長)을 하던 양가 어른들의 친분으로 인해 맺어진 양가 자녀의 혼사를 6.25 전쟁 시기라서 서둘러 1952년 1월 15일에 전통혼례식으로 올렸다. 당시에는 시집가기 전 친가(親家)에서 1년간 묵고 시댁(媤宅)으로 시집가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식을 올린 2주 후, 남편이 음력 설날에 처가(妻家)를 방문했을 때 19세의 순진한 새색시는 부끄러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기에, 마주 앉은 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혼 사진 한 장도 없이 사별(死別)하게되니, 남편 얼굴조차 기억에 남지를 않아 애통하기 짝이 없고 한(恨)이 맺히고 서러웠었다.
나라가 6.25 전쟁으로 불안한 가운데, 남편 영기(永基)는 육군 징집 1기 입영 영장을 받았다. 남편의 숙부가 면장이었고, 전시(戰時)라서 입영 연기는 할 수가 없었다. 1952년 3월 17일, 제주도의 육군 제1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마치고, 신병훈련소 훈련 조교로 배치를 받았다.
시댁의 조부와 큰형이 형무소 간수였고, 둘째 형은 교사였던 엄한 가풍(家風)의 영향을 받은 남편은 훈련병들에게 임진왜란을 이겨낸 충무공의 애민(愛民) 정신과 철저한 국가관을 주입하는 등 조교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최전방 전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에 국가관이 투철했던 남편은 최전방배치를 자원(自願)했다. 서부전선 북한강 서쪽 수도 고지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치열한 합동 공세에 맞서 일진일퇴의 격전 중에 1952년 9월 8일 남편이 전사했다.
미망인이 된 김순임은 전사(戰死) 통지서를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심정에 오랜 기간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 친지들의 위로 및 설득으로 이성을 찾았고,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을 스스로 찾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양가 어른들에게 힘겹게 승낙을 받고 꽃다운 20대 초반에 행상(行商) 길에 나서게 되었다.
선산, 구미, 지례, 증산, 대덕, 황간, 임산, 모동, 추풍령 등 김천 인근 재래시장 5일장에 보따리 짐을 풀고, 포목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교통이 매우 불편할 때였다. 휴전으로 인해 군인 후생사업으로, 군(軍) GM 트럭에 증산, 대덕, 부항면 원목(原木)을 싣게 되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흔들리는 GM 트럭 위에서 눈비를 맞으며, 군용담요를 덮어쓰고 2-3시간을 달려서 김천집에 도착해 피곤한 몸의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새벽에 일어나 다시 행상 길에 나섰다.
이러한 고생을 한 지 17년 만에 평화시장에 작은 점포를 장만하여 ‘문화포목상회’를 열었다. 포목점을 하면서 김순임은 집안 대소사와 길흉사를 일일이 챙기며 가장(家長) 역할을 다했다. 정부에서 지원되는 전사자 연금이 생활에 보탬이 되었고,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고단하기만 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친인척과 지인들은 거듭 재혼을 권유했지만, 밤새워 고민해 얻은 결론은 양가 가문을 생각했고, 부모와 자매를 떠올리며 그런 유혹을 뿌리쳤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70년 세월을 수절하고 절개를 지키며 살아왔던 삶에 이제는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도 있다고 했다.
매달 수령하는 연금으로 노후를 보내며, 주변의 많은 격려와 유공자 표창도 많이 받았다. 이제 건강하게 여생을 보내게 되었기에, 국가보훈정책에 감사함을 갖고 있다. 한편으론 세상에 태어나 이제는 저물어 가는 한평생의 삶이 너무 허망한 것도 느낀다. 살아오면서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며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