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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신문 |
Ⅲ. 김천학의 주요 내용 제시1.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 연구
김천 지역문화의 주체인 인물로는, 근대한국 교육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송설당 여사가 상징성을 갖는다. 그녀의 본디 이름은 알 수가 없고, 1912년에 작성된 호적에 ‘崔松雪堂’이라 적혀 있다. 본관은 화순(和順)이며, 조선 말기인 1855년 8월 29일에 김산군 문산리(現 문당동)에서 아버지 최창환(崔昌煥, 1827~1886)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 사이에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과 김천지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1811년(순조11) 평안도에서 발생한 홍경래의 난이었다. 증조부 최봉관(崔鳳寬)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최봉관의 외가 강릉유씨(江陵劉氏)가 반란군에 가담했고, 더구나 최봉관은 평안도 선천군이 반란군에 의해 함락될 때 힘을 다해 항전하지 않은 죄목으로 처벌받아 옥사했으며, 맏아들 최상문(崔翔文) 등 4명 형제도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었다. 결국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해 버린 것이다.
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은 최상문의 아들로 고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 후 아버지 최상문이 1847년에 사망함에 고부에서 김천으로 이주하였고, 그리하여 김천에서 최송설당을 낳았다.
최송설당이 김천에 거주한 시기는 두 차례로 구분된다. 첫 시기는, 1855년 태어나서 1894년(고종31) 상경하기까지 약 40년 정도이다. 이후 서울에 정착하고서 영친왕의 보모가 되어 몰적된 집안을 신원(伸寃)하고, 큰 재산을 이루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회사업에 기부했다.
드디어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김천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김천으로 돌아와 민족교육에 전념하였던, 1930년 이후부터 1939년 죽을 때까지 10년을 김천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송설당은 84세의 일생에서 전반부 40년과 마지막 10년 등 약 50년 정도를 김천에서 생활한 것이다. 결국 최송설당은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생을 마감한 김천의 인물이다.
최송설당은 전근대사회에서 태어나 근대사회로 이행기에 살다 간 여성이다. 여성이라는 신분과 불우한 집안 출신이라는 중첩된 사회적 한계를 극복해 나갔으며, 특히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과 민족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 투자한 업적은 한국 근대 여성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기에 충분하다. 이와 더불어 많은 한시(漢詩)와 한글 가사작품을 남겨, 송설당을 국문학사에서 ‘조선조 마지막 궁중 여류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1년 4월 25일 字에, 최송설당과 김천의 만남을 “적막(寂寞)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草野)의 김천을 이상의 김천으로”라고 표현하였다. 또 『동아일보』 1939년 8월 17일 字에는, 최송설당의 “유업(遺業)은 천추에 그 빛을 남길 것이고, 공덕과 방명(芳名)은 학교의 운명과 아울러 이 세상 끝까지 영원히 비칠지니”라고 평가하였다.
최송설당의 생애와 업적에서 보건대, 도전정신과 적몰된 가문을 신원한 전통적인 효의 실천, 불교 신앙, 많은 한문과 가사 작품의 창작, 빈민구제 등 애민 정신, 특히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고향에 김천 고보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의 함양을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최송설당이 유언으로 ‘영원히 사학(私學)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루고 한 사람이 동양을 눌러 편안하게 할 수 있다(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라고 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최송설당은 전통적 유학 사상에 의한 효를 실현하였고, 또 불교의 자비심에 바탕한 사회사업, 또 일제강점기 근대적 육영사업으로 민족운동을 선도한 여성이다. 다시 말해 최송설당은 김천의 변화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한국의 여성사, 교육사, 문학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중요한 인물이다. 이에 필자는 김천학의 상징으로서 최송설당 연구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