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면 송죽리 궁장은 감호 여대로 의병대장의 넋과 충절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곳이다. 12일 오전 11시, 감호(鑑湖) 창의비 앞에서, 성산 여씨 김산종친회 주관으로 감호 여대로 의병대장 ‘창의 제431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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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 여대로 선생 창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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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는, 여정휘 성산여씨 김산종친회장, 박보생 (前)시장, 여영각 부회장, 이상욱 시의원, 김동진 면장, 양창열 보좌관, 성경복 바르게살기협의회장, 강영규 남김천농협 전무, 강종욱 신농회장, 김영호 문화홍보실장, 김동열 경북체육회 종목단체협의회장, 강희일 (前)소방서장, 정용현 (前)농업기술센터장, 이창재 (前)부시장, 천병삼 (前)시의원 등과 성산 여씨, 하빈 이씨, 인천 이씨, 진주 강씨 등 사성족(四姓族) 종원들을 비롯해 경향각지에서 17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431년 전 여대로 장군의 조국을 향한 애국 충절의 넋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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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본 여환균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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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환균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개회선언, 국민의례, 감호 여대로 창의비 분향(焚香), 여정휘 김산종친회장 인사말, 강용구 향토사학회총무 기념사, 박보생 (전)시장 축사(祝辭), 여영각 부회장 창의문 봉독(奉讀), 여정수 자문위원 여대로 생애 및 의병활동 소개, 여백동 사무국장 만세삼창, 여환정, 여강연, 여환무 헌시(獻詩), 기념 촬영 순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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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을 하는 여정휘 김산종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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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 도국(圖國) 편에, ‘의(義)는 마땅한 일을 실행하여 성취하는 것이며, 의병은 폭정을 물리치고 혼란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군대이다. 또한 전쟁터는 죽음이 도사리는 곳으로,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도주하면 죽는다. 훌륭한 장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초연하며, 이로써 모든 면에서 뛰어난 적과도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승리하기까지 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대로 의병장의 임진왜란 창의 궐기가 마땅히 그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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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를 하는 박보생 (전)김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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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倡義文)은 국란에 위기에 접해, 의병 거병을 민(民)에게 호소하는 글이다. 박시백에 의하면, “의병(義兵)은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도 없으면서, 위기가 닥치면 떨쳐 일어난 민초(民草)들이 내 가족, 내 고장, 내 나라 그리고 내 임금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싸웠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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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을 봉독하는 여영각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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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조수정실록에는 ‘군사를 소요(所要)하려는 자가 의려(義旅/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를 거둬 모집해 군(軍)을 삼았는데, 주현의 호소(號召)를 받지 않은 자를 의병(義兵)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의병은 자발적 창의와 독자적 유지 그리고 향토 방위의 역할을 했다. 의병은 일본군에 비해 무기나 전술적인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지리에 익숙하고 적절한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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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로의 생애와 의병활동을 소개하는 여정수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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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대륙침략 야욕을 가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 통행권(征明假道)요구에 대한 조선의 거절을 이유로 20여만 군사로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이 발발했다. 조선은 16세기 연산군 이후 체제모순의 표출로 국력이 약화 되었고, 국방 체제의 변환이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에서 침략을 맞아 전쟁 초기에 연패를 거듭했고, 전 국토가 적의 침략하에 놓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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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삼창을 선창하는 여백동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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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유학자들이 제자들 및 친분을 나누던 동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집안의 식솔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지역에 방어 시설을 구축해 왜군에 대항했다. 지역에도 여대로 의병대장이 창의 궐기를 했다. 의병은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중요 교통로를 차지해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재정비해 대일항전을 펼칠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버팀목이자 마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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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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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생으로, 1582년(선조 1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文科)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지만, 1592년(선조 25년) 기를(광명리)로 낙향했다. 그해 4월에 부산포에 왜군이 쳐들어왔고, 한양이 함락당해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여대로는 분루(憤淚)를 흘리며 선조가 있는 북쪽을 보고 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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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박보생 (전)시장, 여정휘 김산종친회장, 김영호 문화홍보실장, 김동진 구성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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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양을 함락한 왜군이 8도에 군영을 설치 함락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모리 데루모토는 경북을 장악할 목적으로 개령에 후방 사령부를 설치해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이 소식은 김산과 지례 등지에 세거하던 여대로 등 유림에게 전해졌고, 이들이 창의하면서 왜군과 의병 사이에 개령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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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영각 황악라이온스 회장, 성경복 바르게살기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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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여대로는 1592년 4월 25일, 왜군 우종대가 개령을 거쳐 김산에 침입 김천역을 점령했고, 좌종대가 거창에 침입하자, 식솔들과 마을 장정 30여명을 모았다. 그리고 “저 무도한 왜적이 침탈해 백성을 도륙하고,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니 원통하고 분노가 하늘에 닿았다. 지례, 김산, 개령은 3도 길목이자, 영남의 요충이다. 나라와 백성이 있어야 고을과 가솔이 온전하다. 이에 마땅히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워 죽기를 각오했으니 누가 나와 함께 하겠는가?”라는 격문을 살포했다. 또한 가산을 헐어 군량미를 마련하고, 아들 삼 형제와 마을 장정들을 인근에 보내 의병을 모으니, 여대로 휘하에 500여명의 의병이 모였다.
여대로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왜군토벌전략을 세웠고, 김성일의 추천으로 지례 현감에 임명됐다. 토요도미는 조선 전역을 장악한 다음 조선군을 보조군대로 삼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군수기지로 하여 명을 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지침에 따라, 전라도 침공 전초전으로 웅치 및 이치전투가 있었고, 지례와 거창 접경지 우척현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우척현은 소백산맥 중턱 거창과 지례의 경계에 있는 험준한 고개이다. 경상에서 호남에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여대로는 김면, 권응성 등 의병과 김성일(金誠一)이 보낸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 관군과 합류해 우치현(우두령)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이때 여대로의 아들 여희우가 전사했다. 우치현 패배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전라도 진격은 실패했고, 더 이상 전라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1592년 7월 말-8월 초, 지례 전투는 의병이 방어책 매복에서 공격적 작전으로 전환한 전투이다. 금산·전주로 향했던 왜군 1,500명이 지례에 주둔하면서 지례·무주 통로는 왜군의 일색이었다. 7월 29일 무풍에서 퇴각한 왜적이 지례향교 창고로 피신, 사창(社倉), 객사, 관아 등을 점거하고 있었다. 여대로, 권응성, 김면, 황응남, 서예원, 강절, 박이룡 등이 왜군을 포위해 화공으로 지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의리(義理)의 유학적 가치는 춘추 의리와 대의명분이다. 의리를 중시한 여대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 유학자들과 교류했지만,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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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여영각, 여백동, 박보생, 여정휘, 김동열,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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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함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여대로의 올곧은 성품은 이이첨(李爾瞻), 정인홍과의 일화에서 엿볼 수가 있다. 여대로는 권세에 굴하지 않고 의(義)를 위해 살고자 했기에,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사헌부 지평으로 내직에 있었을 뿐, 주로 외직인 지방관으로 근무했다.
다음은 대구지방 병무청장을 지낸 여환무의 감호 여대로에 대한 헌시이다.
▪ 추모 의병장 감호 여대로 선생(追慕 義兵將 鑑湖 呂大老 先生)
격문창의기경년(檄文倡義幾經年)
- 창의 격문을 반포한 지 몇 백년이나 지났는가
운집민병기충천(雲集民兵氣衝天)
- 구름같이 모인 의병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승전우두강토보(勝戰牛頭疆土保)
- 우두령 전투에서 승전해 강토를 보위했다.
섬왜지례무공연(殲倭知禮武功連)
- 지례 전투에서 왜적을 섬멸한 무공을 이어갔다.
척사위정청심고(斥邪衛正淸心固)
- 간사함을 물리치고 정의를 지켜 청백의 심지를 굳게 하고
치질연재선정선(治疾捐財善政宣)
- 녹봉을 출연해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선정을 폈다.
구국헌신수불앙(救國獻身誰不仰)
- 구국에 혼신을 다했으니 그 누가 경모하지 않겠는가
휘황의적영유전(輝煌懿績永遺傳)
-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업적은 길이 남아 전해지리라.
한편, 여정휘 성산 여씨 김산종친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위한 감호 여대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지난 그 아픔의 역사를 인식해 이를 나라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여대로 의병장의 창의 의병궐기 기념식이 시민적 사업으로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라고 했다.
사진 : 이남주 취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