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회갑이 된다는 초등학교 제자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를 타서 1시간 30분 후 김천구미역에 도착한다. 막내 처제와 남자 제자 한 명이 맞이방까지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김천 대항면과 영동 매곡면 경계에 있는 괘방령으로 가잔다.
제자 창희가 괘방령을 향해 운전을 한다. 동승해 이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 제자는 초·중학교 동창 인숙이의 막내 남동생. 인숙이, 그녀가 서울 어느 여고에 진학한 이후 소식이 끊겨 궁금했는데. 창희 얘기로는 누나가 7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을 가 결혼했는데, 30대 초반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어린 두 남매를 키우느라 무지무지 고생을 했단다. 학창 시절, 그녀는 흰 피부에 얼굴도 예뻐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아프다.
괘방령에 도착하니 벌써 날이 어둑해진다.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 위해 넘던 산길, 이 고개를 넘으면 과거에 급제해 방을 건다 하여 괘방령이란다. 추풍령으로 가면 가을 낙엽같이 낙방한다나. 제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산장에 들어서니 커다란 플래카드가 식당 전면에 걸려 있다. “KBS 1TV 황금연못 자문단 조용휘 선생님 초청 특강, 주제 :「멋있게 나이 드는 법」”. 퇴임 전·후 내가 재직한 학교와 직함도 적혀 있다. 한 사람씩 모두 인사를 하는데 어떤 제자는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는 이도 있다. 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양해도 구하며.
동기회장인 상휘군이 나를 소개한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온다. 해마다 전국에서 모여 하룻밤을 함께 지내면서 동기애를 다져온 모양이다. 지난해에, 좀 더 의미 있는 모임을 위해 자신들의 초·중학교 시절 선생님을 모시고 유익한 말씀을 듣기로 했단다. 그 첫 초청 대상이 바로 내가 됐단다. 내가 1번으로 선택받은 이유를 물어보니, 처제 제자가 답을 한다. 초·중학교 선배이자 스승이었다는 것과 퇴직 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고마운 마음과 부담감을 버무려 준비해 온 특강을 시작했다. 강의 주제는 ‘멋있게 나이 드는 법’. 자신의 발전을 위한 노력과 가족 구성원 간의 소통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배불뚝이 제자들이,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살이에서의 소통이 중요함을 유머를 섞어 전달하니, 긴장하던 얼굴이 점차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며 머리도 끄덕인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초등학교 교정, 아름드리 플라터너스가 줄지어 서 있다.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와 신나는 노랫소리가 교정 담벼락을 넘는다. 월요일 아침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호랑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는다. 추석 이튿날이면 마을 대운동회가 열린다. 읍내 대축제다. 가을바람에 펄럭이는 만국기 아래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청이 터져라 응원소리가 창공에 울려 퍼진다.
나는, 동료 교사의 막내딸인 처제를 5학년 때 담임을 했었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제의 큰 언니와 내가 결혼을 했다. 혼담이 오갈 때 6남매 중 막내인 이 처제만이 유일하게 혼사를 반대했단다. 왜냐고 물어보니 숙제를 안 해 온 날 나로부터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았기 때문이란다. 주위에서 폭소가 쏟아져나왔다.
그때 나는 풍금 연주 솜씨가 미흡해 음악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늘은 몇 년 간 갈고 닦은 하모니카를 들고 왔다. 그때 진 빚 갚음을 하기 위해서. 내가 하모니카로 “학교 종”을 비롯해 “산토끼”, “태극기”, “고향의 봄”, “기러기”. “여수” 등을 연주하니 제자들이 잘 부른다. 마지막 곡으로 동요 “그 옛날에”를 합창한다. 그 옛날 못다 한 화성이 괘방령 산장을 넘어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추풍령까지 들렸으면 좋겠다.
합창을 마친 여성 제자들의 눈가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 있다. 밖을 내다보니 괘방령의 가을밤은 점점 깊어 가고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괘방령 산장의 가을밤은 점점 깊어 가고, 도란도란 동창생들의 정담은 끝이 없다. ‘그 옛날 동심의 그 얘기를 다시 들려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