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김천신문 |
“김 선생, 오셨는가?”“예, 형님. 오늘은 무슨 일 하시려고요.”“포도나무 죽은 게 몇 군데 있어서 묘목을 심으려고.”“예. 차 한잔하시고 시작하시지요.”“조금 전에 마을회관에서 먹고 나왔어.” “그래도 한잔하시고 하시지요.”“됐어요. 그보다 저 문에 찍혀 있는 화양연화가 무슨 뜻인가?”“화양연화는 꽃이 피고 빛난다는 뜻인데, 저는 오늘도 참 좋은 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랬구나. 연화는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화양이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지 잘 몰라서 물어봤지.”
2023년 3월 11일 토요일 아침에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 화양연화 농장에서 우리 고향의 이장님(시골에서는 아직도 동장이라고 많이 부름)이자 4살 위인 형님과 나눈 이야기이다. 아포 인근에서 샤인머스켓 포도 농사의 최고 권위자이다. 이장님의 포도밭과 5m 정도의 농로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영호의 농막과 포도 농장의 비닐 문에 찍혀 있는 화양연화라는 글자를 두고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사전적 의미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화양연화는 2000년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왕가위 감독이 연출하고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 제목, 방탄소년단의 앨범 제목도 화양연화이다. 또한, 노래 제목, 책 제목, 연주회나 전시회, 빵집이나 음식점 상호 등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퇴직하기 전에 영호는 주중에는 학교 일에 마음을 다했다. 주말에는 농장에 가서 농사일을 즐겁게 했다. 어려서부터 일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농사일을 할 때 어렵고 힘들기보다는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냥 일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인가 의미 있는 말을 적어놓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문구를 고민하다가 농장의 여러 곳에 화양연화 문구를 새겼다. 퇴직 후의 명함에도 화양연화를 새겼다. 아내는 어려운 말 사용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주 좋아한다.
학교에서 교장으로 아침에 아이들을 맞이하는 순간은 참 행복했었다. 선생님들의 좋은 수업을 참관하는 것도 참 즐거웠었다. 학부모님들이 선생님들의 수업을 보고 좋아하면 더없이 행복했었다. 이런 순간은 모두 영호에게 화양연화였었다. 물론 민원이 생길 때도 있고, 교직원들의 갈등이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민원과 갈등도 어쩌면 참 좋은 화양연화를 위한 조금 힘든 화양연화라고 생각했었다. 교장으로서 영호의 화양연화는 오늘도 참 좋은 날이었었다.
오늘도 참 좋은 날에서 ‘도’는 조사로 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이다. 또한, 둘 이상의 대상이나 사태를 똑같이 아우름을 나타내는 보조사로도 쓰인다. 그래서 오늘도 참 좋은 날에서 ‘도’는 긍정의 의미이다. 오늘도 좋다는 것은 어제도 좋다는 뜻이다. 어제도 어제는 오늘이었다. 오늘도 내일이면 어제가 된다. 내일도 내일이 되면 오늘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참 좋은 날은 모든 날이 참 좋다는 긍정의 마음이다.
“교장 선생님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처음보다 더 뜸을 들이고는) 참 멋지십니다.” 2023년 3월 16일 목요일 아침에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다가 후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교통봉사를 하시던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다. 어르신 말씀에 웃음으로 화답을 하고 이유는 여쭈어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알아서 좋은 기분을 흩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르신 말씀을 듣고 영호의 목요일 하루는 화양연화가 되었다. 마침 교정의 살구꽃이 활짝 피었고, 벚꽃도 꽃망울이 몽실몽실한 아침이었다. 어르신의 참 멋지다는 말 한마디에 영호의 목요일 하루도 ‘화양연화, 오늘도 참 좋은 날’이었다.
국립인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는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에 있다. 처음에는 대구교육대학교에 있다가 1998년 12월 16일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도원동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도원동은 경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낙원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원동은 화양연화와 일맥상통한 점이 많다. 영호는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에서 교사로 6년, 교감으로 2년, 교장으로 3년, 총 11년을 근무했었다. 대구의 초등학교 6개교와 4곳의 직속 기관, 교육지원청, 교육청에 근무할 때도 참 좋은 날이었었다. 하지만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에서 11년을 근무한 기간은 화양연화 그 자체였다.
흔히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라고 한다. 그만큼 농부의 사랑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농작물이거나 사랑과 정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농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농부에게 소중한 존재인 농작물에 사랑과 정성을 쏟는 순간은 참 좋은 시간이다. 농사와 교육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다. 교육자는 아이들에게 농부는 농작물에 사랑과 정성이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영호는 그런 사랑과 정성의 순간이 바로 화양연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호가 생각하는 화양연화는 오늘도 참 좋은 날이다.
2023년 9월 1일부터 농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농사일을 많이 돕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농사를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년에 30번 이상의 심의에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있고, 올해 4월 26일부터는 대구교육대학교총동창회 제28대 회장을 맡고 있다. 새벽이나 오전에 잠깐 일을 하다가 오후에는 대구에서 볼일을 보는 때가 많아졌다. 주변에 형님 한 분이 너무 부지런하다면서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영호는 농사를 잘 몰라서 부지런 떤다는 것이라고 대답을 한다. 영호는 반거충이 농사꾼이다.
유월이다. 오늘도 화양연화 농장으로 출근한다. 가능하면 6시 이전에 출근한다. 약이라도 치는 날이면 5시 이전에 도착한다. 제일 먼저 화양연화라는 문구가 반겨준다. 차 소리를 듣고 달려온 고양이는 아침을 조른다. 고양이 집 위의 화이트보드에 매직으로 쓴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화양연화 농장.”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탁자와 의자 서너 개를 야자 매트 위로 꺼낸다. 지나가는 동네 형님들을 큰 소리로 부른다. 취향에 따라 커피나 가지와 개다래 두 가지를 넣어서 끊인 물을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마을의 소소한 일상과 농사 이야기가 오간다. 참 좋은 시간이다. 샤인머스켓의 1차 지베린 처리는 끝났다. 맛 좋기로 소문난 신비 복숭아에는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른다. 올해는 봄 날씨가 들쑥날쑥해서 지난해보다 일주일 정도 늦는 것 같다.
영호가 학교 가는 길은 늘 화양연화이었다. 영호가 화양연화 농장으로 가는 길도 늘 화양연화이길 소망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오늘이 화양연화이면 참 좋겠다. 화양연화, 오늘도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