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문학 태동기를 형성한 문인들
 |
 |
|
ⓒ 김천신문 |
조선을 개국한 사람들은 고려 조정 주변의 인사들이었다. 이성계는 물론 조선왕조의 설계자 인 정도전, 왕사 무학대사가 그렇다.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역성혁명론자들이나 정몽주로 대표되는 고려개혁논자들 모두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다. 조선이 개국했어도 정신적으로는 고려 유신으로 활약한 사대부들이 상당했다. 조선 초 태종 때까지는 엄밀히 말하여 정신적으로는 고려를 산 벼슬아치들이 많았다.
이 시기 김천 지품천현(오늘날의 지례)으로 낙향해 지조를 지킨 학자요 시인으로 장지도(張志道 호 盤谷 1371 공민왕 20 〜 조선 초)가 있다. 그는 지품천 반곡에서 태어나 공민왕 때 향시 합격, 곧이어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벼슬이 기거주, 지의지사에 이르러 고려 유신이면서 조선조의 벼슬을 살았다.. 조선이 개국 되고 교서소감(校書少監)이 되어 이 태조의 명으로 『정관정요』를 교주(1395년 태조 4)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치 혼란과 왕권을 둘러싼 왕자들의 골육상쟁을 지켜 보고는 결국 지품천 반곡으로 귀향했다.
반곡은 고향에 숨어 살면서 육영에 헌신하고 문풍을 쇄신했는데 자녀가 없었다. 많은 제자를 배출했는데 그중에 특기할 만한 이가 뒷날 『삼강행실도』에 오른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이다. 장지도가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고 고향 지례에 은거하면서지은 칠언율시 「반곡음盤谷吟」이 있다.
千年盤谷一區平 천 년 반곡은 한 구역으로 평평한데
占斷前峯起石城 깎아 세운 앞산 봉우리엔 석성을 세웠네
從古幾家爲土姓 내려오던 몇 집안은 토착 성씨 되었고
于今十室得官名 지금까지 여나믄 집안이 관직을 얻었네
簷垂柹栗山中味 처마 아래 드리운 감과 밤은 산중의 진미요
軒鎖雲煙世外情 처마 감싼 안개와 구름은 세상 밖 정경일세
莫恨盛時曾見棄 좋은 시절 일찍이 버렸다고 한하지 마라
好爲閑客此閑行 한가한 나그네로 이곳에 한가로이 지내는 것을.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교남지』, 『품천사』, 기타 향토사지.
|
 |
|
장지도 선생의 고향 김천 지례 거물2리
|
|
지례 반곡의 경치와 토산물을 예찬하면서 한가로이 즐기는 정취를 그렸다. 당시 지례 출신으로 관직에 오른 인물이 만만찮았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시적 화자 자신이 정계에서 소외됐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이 작품은 김천인이 김천의 소재로 향토 사랑과 자기애를 그려낸, 최초의 김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태종(재위 1400〜1418)부터 연산군(재위 1494〜1506)까지는 조선이 나라다운 면모를 갖춘 시기라 할 수 있다. 건국한 태조로부터 실질적으로 왕권을 형성한 태종은 국가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마련해서 실현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개혁 정치로부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발생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성종이 있는 동안은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였다. 마침내 일어난 두 번의 사화로 나라가 요동친 연산군 시기까지는 나라가 평온했던 편이었다.
본격적인 김천문학은 조선 초기부터 양산된 것으로 탐구된다. 세종 때 금릉 조마 출신으로 29세에 과거 급제한, 시재 뛰어났던 문신 최사로(崔士老 호 元老 1406 태종 6〜1469 예종 1)가 있다. 단종 때에 춘추관기주관으로 『세종실록』 수찬에 참여했으며, 1468년(예종 원년)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그의 시 「능성 구좌상에게 올림上陵城具左相」이 있다.
落魄功名似積薪 낙백한 공명은 땔나무와 같고
晴窓萬卷更誰親 밝은 창 안 만 권의 책, 다시 누구와 친하겠나
財無適用還宜散 쓸데없는 재목은 버려짐이 마땅하나
酒不能賖始覺貧 외상으로도 술 못 사니 가난함을 깨닫네
末路堪悲身作客 말로에 슬프기도 하지만 몸은 나그네 되고
此心猶與物爲春 이 마음은 아직도 봄이 됨을 느끼네
莫言陋巷常岑寂 누항이 늘 적막하다고 말하지 말라
上相頻過是故人 재상이 자주 찾으니 바로 이 내 친구라네
- 『동문선』, 『김천시사 Ⅳ』(김천시, 2018)
|
 |
|
지례 도곡1리에 있는 장지도 선생의 묘소
|
|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몹시 가난하게 지내는 사정이 그려 있다. 구 좌상이란 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具致寬 호 陵城. 전남 능주 태생 1406 태종 6 ∼1470 성종 1)을 가리킨다. 공명을 잃고 낙백해 있는 심사를 친구인 좌상 구치관이 자주 찾아와 줌에서 위로를 삼는다 한다. 두 사람은 절친하여 뒷날 최사로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구치관이 그의 묘비문을 썼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추앙을 받은, 김천의 문신 이약동(李約東 호 老村 1416 태종 16〜1493 성종 24)이 있다. 그는 김산 하로(賀老, 현재의 김천 양천동) 출신으로 개령현감 김숙자金叔滋의 문하생으로 수학하고,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매계 조위曺偉 등과 교우했었다. 이약동이 김종직보다 연세가 15살 위였기에 김종직은 언제나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이약동은 스물여섯 살 되던 1442년(세종 24)에 진사시에 합격, 서른여섯 살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사헌부감찰, 성균관직장, 청도군수, 제주목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사간원대사간, 경주부윤, 호조참판,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윤, 개성유수, 지중추부사(정2품) 등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청백리로 언급하고, 최남선이 창간한 종합잡지 『청춘』(1914)에는 조선500년 대표인물 100인 선정의 청렴 분야에 뽑힌 청백리다. 노촌이 자손들에게 경계하는 뜻으로 쓴 시 한 수를 소개해 본다.
家貧無物得支分 살림이 가난하여 나누어 얻게 할 것은 없고
惟有簞瓢老瓦盆 오직 있는 것이라곤 표주박과 낡은 질그릇일세
珠玉滿籝隨手散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不如淸白付兒孫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 하네
- 『김천시지』(김천문화원, 1989)
자신의 생활신조를 잘 드러내어 집안 관리는 물론 자녀 교육에 교훈으로 남긴 시편이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김산 하로 마을로 귀향할 때에 초가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만년에 양천동 하로촌賀老村에 물러와 살면서 ‘賀老’를 호로 삼았다. 마을에서 이약동을 비롯한 삼판서와 육좌랑이 배출됐기에 『김천향토지』(1950)에서는 하로촌을 김천에서 제일 이름난 마을로 꼽은 바 있다. 김천문화원에서 주관하여 매년 노촌의 청백리정신을 확산하고자 노촌이약동청백리상을 수여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