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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호 역사인물 기행[26]

백호 임제(林悌, 1549-1587)
잔(盞)들어 권(勸)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3년 06월 08일
ⓒ 김천신문
조선 중기 천재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임제의 호는 백호(白湖), 자는 자순(子順)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장인이기도 하였던 그는 고려 말 72현인 중의 한 명인 임탁(林卓)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는 제주목사를 지낸바 있는 임진(林晉)이다. 타고난 풍류가객이었던 백호는 젊어서부터 칼과 거문고를 함께 어깨에 메고 다닐 만큼 성격이 강직하고 문장이 호방하였다.

백호의 스승 대곡 성운(成運)은 그의 급한 성격을 순화시키기 위해 중용(中庸)을 1천 번 읽도록 권유하였다. 백호는 스승의 뜻에 따라 속리산에 들어가 중용을 800번쯤 읽자, 이만하면 하산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하산하였다. 나이 28세 때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1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흥양현감을 거쳐, 서·북도 병마사, 예조정랑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벼슬을 내려놓고 전국을 방랑하는가 하면, 당쟁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국을 한탄하며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래기 일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춘삼월 한양에서 수원(水原)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려 주모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동침하게 되었다. 그런데 새벽녘 주모의 남편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나이가 도끼를 들고 나타나 당장이라도 내리치려는 게 아닌가. 백호가 벌거벗은 몸으로 ‘기왕 에 죽을 바에는 시나 한 수 짖고 죽겠으니 잠시 시간을 달라고 사정하자, 남편이 이를 허락하였다. 어젯밤 장안에서 술에 취해 여길 오니(昨夜長安醉酒來)/ 복숭아꽃 한 가지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네(桃花一枝爛漫開)/ 그대는 어찌하여 이 번화한 땅에 꽃을 심어두었는고(君何種樹繁華地)/ 심은 자(者)가 잘못인가 아니면 꺾은 자(者)가 잘못인가(種者非也折者非).

백호가 시를 다 적은 다음 이제 죽여도 좋다는 자세로 목을 쑥 내밀었다. 그러자 주모의 남편은 백호의 시를 한참 들여다본 후, 아내를 뭇 남자들과 격의 없이 접촉할 수 있는 주막에 둔 자신에게도 잘못도 있음을 인정하고는, 술상을 들여와 백호를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하지만 행운은 항상 반복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한 번의 요행으로 간신히 위기를 피한 백호에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단(事端)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의 나이 35세 때 평안도사직을 제수받고 임지로 향하던 중 송도(松都)에 이르렀을 때였다.

백호는 ‘평소 세상만사 모두 부질없는 일이지만 시가(詩歌)와 미녀(美女)만은 사랑할 만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그가 송도를 지나는 길에 천하제일의 명기(名妓) 황진이(黃眞伊, 1506년~ 1567년)의 무덤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잔에 술을 따르고 큰절을 올린 다음, 지필묵을 꺼내 일필휘지 적어 내려갔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 듯 누운 듯/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盞)들어 권(勸)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그 옛날 이백과 두보가 살아 돌아온들 이토록 애절한 사랑을 또 노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시조(時調)가 죄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문제는 ‘어명(御命)을 받은 관리가 임지(臨地)로 가던 중, 관복을 입은 채로 천한 신분의 기생 무덤에 잔을 올리고 시를 읊은 것’이 빌미가 되었다. 결국 백호는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 통보를 받고 벼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나 백호는 더 이상 벼슬살이에 연연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야박(野薄)한 세태를 탄(歎)하기보다는 시와 술과 함께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다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문집으로는 700여 수가 넘는 시와 시조 등을 담은 『백호집(白湖集)』이 있다.

최재호, 칼럼니스트/ 전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김천신문 기자 / kimcheon@hanmail.net입력 : 2023년 06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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